080214 木 white plains

Diary 2008/02/21 07:50

2008년 2월 14일 목요일, 발렌타인 데이

미국에서의 첫 나들이

오늘은 태권도 사범 언니를 따라 나서기로 했다. 그녀가 일하는 곳 근처 도시로 가 성은과 나는 구경을 하고 퇴근길에 우리를 데려가기로 했다. 어젯밤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녀를 보기 위해 달라스에서 날아왔고,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3월이면 결혼을 한단다. 3월의 신부.

날씨는 다행히 춥지 않았다. 차는 신나게 달렸고, 나도 신이 났다. 온 몸의 세포들이 깨어나는 듯 했고, 온 몸이 찌릿해져왔다. 창밖으로 집들이 보였다. 그림 같은 집들이었다. 집들은 커다란 나무들과 잘 어울려 있었다. 모든 집들이 숲속에 있는 듯 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보는 내내 가슴이 벅차 올라 눈물이 날 뻔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고, 감동했다. 마음의 근심들이 사라졌다.

그렇게 30분이 흘러갔고,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White Plains

그녀는 우리가 잘 구경할 수 있도록 차로 돌며 이곳저곳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월마트에 갔다. 말로만 듣던 월마트. 월마트는 커다랬고, 사람들도 커다랬다. 그녀는 연락하기 쉽도록 핸드폰을 만들자고 했다. 미국에서 핸드폰 만드는 방식은 독특했다. 마트에서 핸드폰과 선불카드를 고르고 결재하고 등록하면 끝. 그리하여 우리는 39불에 삼성 핸드폰을 구입했다. 갑자기 기분이 묘해졌다. 미국인이 된 느낌이랄까.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렇게 우리를 도와주고는 유유히 사라졌고, 나와 성은은 월마트를 구경했다.

나는 마트 구경을 참 좋아한다. 일본에서도 마트 구경을 가장 좋아했다. 뭐랄까. 그 집 냉장고를 보면 그 집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마트를 보면 그 나라를 알 수 있고,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있다랄까.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면 냉장고를 먼저 구경한다. 아무튼 나는 마트를 좋아한다. 뭔가 사지 않고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족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눈이 가는대로, 발이 가는대로 움직였다. 분명 같은 용도로 사용되는 같은 물건이지만 나라마다 다른 언어, 같은 물건이지만 조금씩 다른 모양새, 같은 물건이지만 조금씩 다른 느낌이 너무나도 재미나다. 그렇게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오가던 나의 시선은 크레용에서 멈춰섰다. 아기자기한 미국식 크레용. 이거 하나 사주세요. 이것만 있다면 어떤 그림이라도 신나게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장이라도 아빠를 조르고 싶었다. 하지만 내 곁에 아빠는 없었다. 한참을 서 있다가 하루에 세 번이상 매일 생각난다면 사러 올테야 스스로를 타이르며 발길을 옮겼다. 나는 또 어마어마한 스타킹의 세계를 발견했다. 엄청난 종류의 스타킹이 눈앞에 펼쳐졌다. 매끈한 다리를 자랑하는 모델 언니들은 그걸 신는다면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듯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 뽑기통에 담겨져 있는 55센트 스타킹도 매우 흥미로웠다. 뉴요커들에게 스타킹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긴 하지.

나는 또 신발 섹션에 가서 저렴하기는 하나 질 좋아 보이지 않는 대량의 신발들도 구경했다. 그곳에서 나는 컨터키 소녀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귀엽고도 고풍스러운 구두를 발견해 또 망설이다 나의 쇼핑 신조(하루에 세 번이상 매일 생각난다면 그것은 사야하고 그렇지 않다면 순간의 혹함이었던 것이다)를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성은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었다. 아직 일층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이렇게 흘러 버렸다니.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월마트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서점으로 향했다.

Barnes & Noble

고급스러운 서점이었고, 원서 칸에서만 보았던 책들이 서점을 가득 메우고 있는 눈앞의 현실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지, 여기는 미국이지. 아무리 멋져 보인다 한들 모국어가 아닌 터라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러하니 별다른 흥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지금의 미국이 만들어 낸 책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유치찬란한 Teens 잡지를 발견했다. 아주 흥미로웠다. 표지를 장식한 앞머리를 한껏 띄운 여학우, 밀키진을 디스코 라인으로 입어 준 남학우, 허리띠를 있는 힘껏 졸라매고 칼라풀한 머리띠를 한 여학우, 가죽 쟈켓과 선그라스로 한껏 멋을 낸 남학우들의 모습에서 세련됨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알록달록 원색과 형광색으로 멋을 내고 디자인한 책은 입맛을 당기게 하긴 했지만 사고 싶게 만들지는 않았다. 갑자기 좋아진 기분으로 나는 서점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Green에 관련된 책들이 모아져 있는 부스를 발견하고는 보고 싶었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 환경을 생각한다는 이미지를 전혀 받지 못한 나는 나의 그린 프로젝트를 잘 수행하고 갈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을 했었다. 그러다 이렇게 우연히 그린에 대한 미국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했다. 그래, 이제 시작이야.

배고픈 우리는 서점을 나와 피자집으로 향했다. 미국에 왔으니 느끼한 피자를 먹어주는 것이 예의지. 미국에 오기 전부터 나는 미국에 가면 느끼한 피자, 햄버거, 과자, 아이스크림, 빵을 잔뜩 먹어야지 생각했다. 분명 몸은 썩을 거야, 아니 썩지 않게 될 거야. 분명 엄청나게 살이 찌겠지, 그럼 미국인 몸매가 되는 것일까. 모든 것이 예상됐지만 재미날 것 같았다.

Nicky's pizza

쉽지 않은 메뉴 보기와 쉽지 않은 주문하기를 무사히 마쳤다. 이제부터 정말 미국인들과의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래, 쫄 것 없어. 어찌되든 말은 통하기 마련이야.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역시 미국인들의 식성은 대단했다. 사람들은 코스트코에서나 보았던 빅사이즈의 조각피자를 두 조각씩 먹고, 또 엄청나게 큰 바게트에 치즈를 잔뜩 얹고 오븐에 구워낸 빵도 각각의 몫으로 먹고 있었다, 게다가 엑스라지 사이즈의 콜라까지. 곧 우리의 피자가 나왔다. 마르게리따 피자였는데 기름이 좔좔 흐르고 뚝뚝 흐르는 게 미국다웠다. 우리는 수돗물 맛이 나는 콜라와 함께 몸에 좋지 않을 것이 뻔한 이 음식을 맛있게도 먹었다.

미국인들의 넉넉한 인심에 배가 터질 것만 같았다.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팁문화에 익숙해 지자 다짐하며 팁을 두고 나왔다. 쇼핑몰로 향했다.

macy's

나와 미국은 스타일이 맞지 않는 것일까.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뭔가 엉성해 보이고, 깔끔함과 세련됨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야. 이곳이 좋지 않은 쇼핑몰이어서 그런 것일 거야. 즐겁지 않은 눈은 쉽게 피로해졌다.

target

성은과 나는 더 나은 볼거리를 위해 이동했다. 이곳 역시 볼 것은 없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귀여운 장갑 하나를 장만했다. just 4.66$

작은 성당이 하나 보였다. 문이 열려 있었다. 우리는 들어갔다. 오르간 소리가 들렸다. 고요한 가운데 울려 퍼지는 오르간 소리가 참 좋았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앉아 잠시 기도했다. 마음에 흰 눈이, 고요함이 쌓였다. 살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는 오르간 반주자이며 주말에 앞서 연습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성당을 조용히 빠져 나왔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우리는 쉴 곳을 찾았다. 핸드폰을 충전할 수 있는 곳. 하지만 쉽지 않았고, 우리는 더욱 지쳐갔다. 그러다 결국 처음 본 곳인 스타벅스로 향했다. 첫날부터 스타벅스에 가고 싶지 않았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스타벅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의 스타벅스는 나의 편견을 반감을 단숨에 바꿔버렸다. 무슨 식물원마냥 생긴 이 스타벅스는 어여쁜 자태를 뽐내며 도시 한복판에 생뚱맞게 서 있었다. 좌석은 매우 적고, 일하는 사람들의 공간이 큰 걸 보고 이기적인 스타벅스 라고 생각했다. 들어가기를 망설이던 나였다. 그러나 들어서는 순간 나는 유쾌해지고 말았다. 우리를 맞이한 바리스타가 친절하면서도 유쾌한 태도로 메뉴를 추천해 주었기 때문. 그의 기분 좋은 넉살에 그만 아메리카노를 시키려던 나는 그가 추천해준 페퍼민트 핫초콜릿을 시키고 말았고, 아무 생각없이 돈을 지불했다, 마치 마법에 이끌린 듯.

페퍼민트 핫초콜릿 2.70$

How about that?

I'm not yet.

멍하니 서서 메뉴판을 좀 더 구경하고 있던 나에게 그는 웃으며 말을 걸었다. 나는 그에게 답하기 위해 한 모금 마셨고, 맛은 훌륭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계산을 도와주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It's very good. Thank you.

Welcome, thank you.

정말 맛있었다. 가격도 한국에 비해 저렴한 편이니 나쁜 마음을 가질 것이 없었다. 더 이상 내가 생각하는 웃지 않는 불친절한 카페가 아니었다. 집 앞 친근한 카페에 온 것 같았다. 우리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핫초콜릿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 input.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무언가 불편함을 느껴서였다. 마음을 이야기했고, 솔직해지기로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참으로 좋은 시간, 참으로 좋은 경험, 참으로 좋은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주말에 만나기로 한 jadee에게 전화를 걸었다.

Hello, Jadee. I'm sunyoung.

나는 짧은 통화를 마치고, 긴 이야기는 성은에게 맡겼다. 실전을 많이 경험해보지 않은 나는 아직 많이 두렵고 서툴기만 하다.

용기를 내, 선영

우리는 더욱 달콤함으로 힘을 내기 위해 시나몬 롤을 먹으러 갔다. 시나몬 롤 3,77$

와, 맛있어 로 시작한 시식은 와, 도저히 못 먹겠어 가 되었다. 넉넉한 인심의 미국인은 푸짐하게 올려 진 생크림 위에 푸짐하게 카라멜을 얹어 주고는, 그 위에 달달한 피칸까지 넉넉하게 뿌려주었다. 그 맛은 어찌나 달던지.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우리는 집에 가기에 앞서 장을 보기 위해 다시 월마트로 향했다. 지하 코너.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식빵을 보고 한 번 놀라고, 엄청나게 큰 음료수병들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씨리얼을 보고 행복해했으며, 엄청나게 많은 양의 씨리얼을 보고는 경악했다. 과자들은 유해하게만 보였고, 먹고 싶은 생각은 눈꼽 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애초 예상보다 간단하게 장을 보았다. 그리고 태권도 언니가 왔고 우리는 집에 가게 되었다.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

언니의 남자친구는 자신이 여자친구에게 선물한 초콜릿을 맛보라며 우리에게 건넸고, 언니는 우리에게 짜장면 먹어야 겠네요 하며 놀렸다. 우리는 지친 마음에 서글픔이 더해져 초콜릿을 먹었고, 집에 오는 내내 잠에 들었다.

또 하루가 흘러갔다

현실이지만 현실 같지 않고, 미국이지만 미국 같지 않은 이 기분. 무언가 마음속에 쌓이는 듯 하나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까지는 모르겠다. 다만 조용히 지켜볼 따름이다.

by 복태

Posted by 그리너